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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문] 기린의 날개-히가시노 게이고

Benya_1004 2024. 1. 23. 19:59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가 재미있는 이유는 사건의 발생과 해결과정이 유기적으로 흘러가면서 흡입력 있게 독자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아오야기 다케아키라는 한 남자가 살해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니혼바시 다리를 홀로 걸어가던 그는 기린의 날개(동상) 밑에 멈춘다. 죽음이 찾아올 걸 알면서 기린의 날개를 찾아야만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뼈대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까지 가족이 집에 오지 않고…불현듯 침묵을 깨는 전화가 집에 울린다면 어떨까. 경찰서나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늘 불길함을 동반한다. 아오야기 다케아키의 아내 후미코, 아들 유토, 딸 하루카는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듣게 된 남편, 또는 아빠의 사망 소식. 처음에 그들은 일반적인 반응을 보였다. 누가 나의 남편, 또는 나의 아빠를 죽였는지, 왜 내 가족이 죽어야 했는지 울분을 토하고 슬퍼하고 오열했다. 
 그리고…'현실을 인식하였다' 
 아내 후미코는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아 할지 회사에서 좀 도와줄지 고민을 하고, 아들 유토는 앞으로 생활을 어떻게 할지, 대학에는 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산 사람에게만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날이 시작된다.
 
 형사는 고인이 살해된 이유를 알기 위해 세 사람에게 질문을 하고 유품을 보여주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다. 내용물 중에 없어진 거나 이상한 점이 있는지 모른다. 후미코는 남편의 지갑을 열어본 적도 없고, 유토는 아빠의 지갑이 어떻게 생긴 건지 알아도 그 지갑 속에 무엇을 넣고 다니는지 알 수 없다. 줄줄이 놓인 비닐 봉지 속에 있는 서류와 수첩, 안경 케이스, 명함 지갑, 필기구, 문고본 등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유토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유족에게 형사가 짜증을 느끼는 건 아닐지 상상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새겨 넣는 가족 간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가족의 물건을 자세히 알고 있을까? 물리적으로 곁에 있으나,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가족 구성원들. 언제부터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었는지 모른다.
 
 시신이 발견된 현장 주변을 심문하고 있던 순경의 추적을 받고 야시마 후유키라는 남자가 급하게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후송되었으나, 아오야기 다케아키의 유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살해범이건 목격자건 현장에 있던 사람이었다.
 경찰 수사에서 두 사람의 공통점이 밝혀진다. 아오야키 다케아키는 가네세키 금속 공장의 제조 본부장으로 일했으며, 야시마 후유키는 인력 파견 회사를 통해 계약직 근로자로 일했다.
 가네세키 금속 공장은 직원의 안전성보다 제품 생산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던 곳으로, 인터로크(안전장치)를 끄고 작업을 진행하였다.
* 인터로크:  제조 라인에서 작업하다가 실수로 작동하고 있는 기계를 만지면 위험하므로기계에 커버를 씌우고 커버 문을 열면 자동적으로 기계를 멈추게 하는 안전장치를 말한다.
 
 야시마 후유키가 근무할 때 작업복의 바짓부리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여 들어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그는 머리를 부딪히고 5분 동안 의식을 잃었다. 후속조치로 작업반장은 야시마 후유키를 조퇴시켰고 1주일을 쉬게 하였으나, 그는 목의 통증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했다. 치료 받기 위해 병원에 가고 싶었으나, 소속된 인력 파견 회사에서 직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치료비를 자비로 내지 못하여 병원 치료를 받지 못했고, 사고를 물고 늘어질까봐 가네세키 금속 공장에서 근로 계약은 갱신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배경이 밝혀지며 경찰 수사 방향과 언론 취재 방향은 한 곳으로 몰렸다. 야시마 후유키가 자신을 해고한 사람에게 복수하였던지, 아니면 재고용을 추진하다가 뜻대로 안 되어 아오야키 다케아키를 살해했다고 말이다.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지만 세상은 니혼바시 살인사건에 대한 추정으로 얼룩지고 황색언론과 백색소음을 컨트롤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가족들은 세간의 모진 풍파를 견뎌야 했다.  
 
 소설 속 이야기지만, 정황 상 유명 연예인의 죽음이 생각났다.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수사가 강행되면 증거가 없어도 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될까?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거라는 심증을 가지고 여론이 형성되면 사실에 대한 명확한 검증 없이도 누군가에게 죄가 부여된다. 가령 시간이 지나 사실이 드러나고 누군가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 해도 여론이 부여한 죄는 벗어던지기 어렵다.
 
 한 방송국이 야시마 후유키의 동거인이었던 가오리에게 인터뷰를 하며, 후유키를 산재 은폐의 피해자로 다케아키를 가해자로 보도했을 때 후미코, 유토, 하루카는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 주위 이웃과 학교 친구들은 아오야키 가족을 매도하고 무시한다. 이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던 하루카는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로 발견되고, 유토는 그렇게 죽어버리면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진실을 인정하는 꼴이라고 화를 낸다. 
 
 유토는 그저 견딘다. 어느 날 하루카에게 언제까지 울고 있을 거냐고 소리를 친다. 하루카는 오빠와 다르게 나한테 아빠는 소중했다고 얘기하며, 오빠는 아침마다 아빠와 마주치기 싫어서 일찌감치 나가지 않았느냐고 반박한다. 유토가 자신도 아버지가 소중했다고 말하자, 그건 애정이 아니라 돈 벌어오는 사람이 없어질까 봐 걱정했던 거라고 외친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가족의 모호한 애정에 대한 질의가 생긴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가운데, 가가 형사가 피해자의 동선을 추적하며 사망 전 아들 유토의 학교 선생님에게 연락했던 사실이 밝혀진다. 학교 선생님은 별일이 아니라고 했으나, 3년 전 슈분칸 중학교 수영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가 회자되며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난다.
 
 추리 소설에서 '범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추리소설이니만큼 범인은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만큼은 범인보다 피해자의 행동에 눈길이 간다. 그가 왜 기린의 날개 밑에서 숨을 거두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 마음의 파동이 울린다. 
 겉으로 보이는 가족 관계가 모든 것을 나타내지 않으며, 때로는 숨겨진 마음이 강력한 행동의 동기가 된다. 아오야기 다케아키는 외면상 뜨뜻미지근한 사람으로, 혹은 냉랭한 사람으로 비춰졌겠지만 가족을 향한 뜨거운 진심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아오야기 가족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특히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은 아오야기 유토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올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달라졌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선택의 순간이 온다. 미성숙한 아이들은 법, 양심, 신념 외 가족, 친구 등의 인간관계에 쉽게 영향을 받고 '선택'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미련과 후회를 남기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지 의심을 한다. 진정성 있고 성숙한 의식을 지닌 어른이 이들을 이끈다면, 다른 길이라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어른들이 많아지는 세상을 되기를 기원한다.